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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4장 [전체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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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작성일 24-01-26 20:57 조회 6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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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과 임진강 4장 

-임진강 혈투-

 

석현성, 아달성, 적목성등을 함락시키며 예성강 유역을 장악한 당군은 양주분지를 통해 한강 유역으로 가는 통로에 위치한 칠중성을 목표로 진군한다

 

6752월에 벌어진 칠중성 전투는 중국과 우리 사료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측 자료들은 칠중성에서 신라군을 크게 격파하며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있고, 우리측 자료들은 칠중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에 권창혁은 중국측 사료들이 칠중성 전투에 ’·‘攻陷등의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大破新羅之衆~’과 같은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의구심을 품고, 칠중성 전투를 不克이라고 서술하고 있었던 점에 주목한다. 즉 이 표현은당 군이 칠중성의 신라군에게 不克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 끝내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권창혁의 논지에 따르면 당군은 칠중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임진강 남안으로의 진출 역시 제동이 걸린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논쟁이 매소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매소성의 위치를 두고 양주의 대모산성이라는 설과 연천의 대전리산성이라는 설이 양립하고 있는데, 앞의 논지에 따르면 당군은 임진강 남안으로 진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양주 대모산성이라는 설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칠중성이 당군에 함락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당시 신라는 칠중성과 대전리산성을 제1 방어선, 양주 대모산성을 제2 방어선, 한강유역의 북한산성(아차산성)을 제3 방어선으로 삼아 부채살 형식의 종심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만약 당군이 칠중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면, 필시 북한산성이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칠중성을 거쳐 양주 중랑천을 따라 남하하기만 하면 한강 하류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당군은 칠중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했으며 둘째, 양주 대모산성은 매소성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매소성은 연천 대전리산성이 되는데, 대전리산성 인근에는 전곡리토성, 은대리성, 초성리토성 등 많은 성곽들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20만에 달하는 대규모 당군이 주둔하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6752월 칠중성 전투를 전후로 하여 발생하는 또다른 논쟁이 과연 675년 이후의 전역이 당군의 주된 관심사에 속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당 전쟁과 임진강’ 1편과 2편에서 당나라를 둘러싼 외교정세를 다루며 서부 토번의 흥기를 다루었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당나라 주요 장군인 이근행이 당나라 서역 지방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근행을 따라 당나라군대를 보조하던 말갈 병력들이 함께 이동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논쟁의 향방이 결정되는데, 이상훈은 나당전쟁에는 말갈병이 주력으로 투입되었다기보다, 중국 동부의 하북도·하남도·강남도의 병력이 투입되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말갈병이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근행은 말갈족을 대표하는 蕃將이라기보다는 당의 행정체계에 흡수된 客將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이근행이 토번으로 이동했다고 하여 말갈병 다수가 그를 따라 이동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당의 군사전략 중심이 동북에서 서북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구체적으로 676년 윤3월 이후이다. 이때 토번의 당 內地 공격으로 인해 감목장 상실·교통로 단절·군사력 약화는 물론 수도 장안까지 위험에 노출되자, 당은 군사전략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매소성 전투가 발생한 6759월은 당이 공세를 지속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매소성 전투가 발생한 6759월은 당이 철수를 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으며, 당이 토번을 공격하기 위해 사전에 한반도 주둔군을 이동시켰다고 볼 근거도 없다.

 

 

사진자료

imjigang.jpg

임진강 주변 관방유적 <경향신문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100800021(2024.1.1.)>

 

석현아달적목.jpg

석현성,아달성, 적목성 <구글맵>


참고문헌

국내논문, 이상훈, 나당전쟁기 매소성의 위치와 매소성 전역의 위상,한국 고대사탐구 41, 2022

국내논문, 권창혁, 나당전쟁 시기 매소성 전투와 신라의 북방전선,한국 고대사 연구 95, 2019

이상훈, 羅唐戰爭의 종전배경과 新羅의 역할, 동북아역사논총 32, 2011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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